[BL]악역이 추구하는 낭만

06. 급식실로 향하니 줄이 엄청나게 길었다. 많은 아이들이 모인 만큼 많은 페로몬이 뒤섞여 코를 지나 뇌를 강타했다. 생리적인 혐오감에 눈가가 슬며시 찌푸려졌다. 원래 이럴 땐 자신의 페로몬을 몸에 둘러 방패처럼 쓰는 게 좋은데, 차도연은 그러질 못하니 고역이었다. 마냥 여기 계속 서 있자니 밥 먹기도 전에 속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. 매점이나 갈까 생각했...

05. 말을 뱉고 나니 어감이 좀 이상했다. 아니, 정정하겠다. 그냥 이상했다. 짧은 침묵이 내려앉고 가시자 민망함이 몰려왔다. 내가 유명하긴 뭘 유명해. 스스로의 멍청함에 감탄이 나올 지경이다. 그녀들에게 물어보려던 뜻은 그게 아니라 어째서 모두가 나를 아냐는 질문이었는데. 뇌 필터링을 거치지 않고 내뱉으니 너무 날것 그대로 툭 튀어나와 버렸다. 표정을 ...

04. 저절로 헛구역질이 나왔다. “욱―!” 명백히 사람을 찍어 내리기 위한 페로몬이었다. 나는 떨리는 손을 숨기기 위해 주먹을 쥐어 보였다. 반사적으로 그를 밀어내고 싶었지만, 몸이 안 움직였다. 마치 누군가 어거지로 몸을 꽉 누르는 듯한 느낌. 점점 더 짙어져 가는 페로몬에 의해 이건 아니다 싶어 애써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말했다. “페로몬 치우지, 그...

03. 그 명찰을 확인하자마자 시선을 내리깔았다. 메인수가 왜 서브공 옆에서 사는데, 이런 서술은 없었잖아. 어째 어제부터 자꾸 원작과 다른 듯 비슷하게, 콕 집어 말로 설명할 수 없이 오묘하게 흘러갔다. 물론 생략된 부분에서 캐릭터들이 어떤 식으로 행동하더라도 그건 작가가 정한 부분이 아니기에 자유를 가질 수 있다만. 최종 악역 옆에서 산다는 건 서술이 ...

02. “아니, 쟤가 왜 여기 있어?” 나는 어이없음을 감추지 못한 채 인터폰을 노려봤다. 정확히는 화면에 비친 무표정의 중학생을 말이다. 지금쯤이면 수를 만나서 이러쿵저러쿵 하다가 발현이 와서 집에 가야 하는데. 그렇다고 어린애를 계속밖에 세워둘 수 없는 노릇이기에 문을 열어줬다. 검은 연미복을 입고 머리를 반 깐 형태로 올린 모습이 차마 중학생이라고 할...

01. 비가 억세게 쏟아지던 어느 날.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거리를 뛰었다. 단정하게 묶여있던 넥타이는 잔뜩 흐트러져 뛰는 대로 같이 나풀거렸고, 큰마음 먹고 산 구두는 비를 뚫느라 축축하게 젖어있었다. 하지만 그 어느 것 하나도 달려가는 나를 멈출 순 없었다. 꺼져있는 핸드폰을 간절하게 쥐며 목적지로 향했다. 일그러지는 미간을 애써 펴 보이며 무사하기만을...